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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어디지? 김독자는 당황스러움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푸르른 잔디가 펼쳐진 곳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곳은 아니었다. 기억을 되짚어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을 위해 지하철에 몸을 실었고 문이 열렸고 발을 내딛었다. 그뿐이었다.
‘이게 무슨..’
당황스러웠다. 평소에도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었지만 현실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이것은 흔한 소설의 클리셰지만 그것은 허구였다.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상황을 정리했다. 생각해보자.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예로부터……. 생각을 하기는 개뿔 이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한다는 것인가. 김독자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함에 휩 쌓였다.
“너, 누구냐.”
검은 도포를 입은 한 남자가 나타났다. 불안함 때문에 주변에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까지 눈앞에 나타난 남자를 훑어보았다. 딱 봐도 입은 옷은 비싸보였다. 높은 사람의 자제분인가? 잘 보여야겠는데. 생각을 마친 김독자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당황하셨죠? 괜찮습니다. 소인은 김독자라고 하옵니다.”
입은 옷을 보건대 분명 옛날 시대임은 틀림없었다.
“입은 옷이 희한한데 어디서 온 자객이냐. 옳은 대로 말하지 않으면 이 검이 자네의 목을 가져 갈 테니.”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을 꺼내 김독자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얕은 살이 날카로운 면에 살짝 닿아 피가 약하게 흘렀다.
“자객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대를 도와주기 위해 미래에서 온 자입니다.”
“그대?”
김독자의 말에 검은 도포를 두른 남자의 눈썹이 꿈틀대더니 이내 얼굴이 구겨졌다.
“왕에게 그대라고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이 나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칼이 김독자의 목으로 스며들었다.
“잠깐!!! 제가 미래에서 왔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알아보지 못한 것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미래라. 그래 확실히 네 녀석의 복장은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지.”
제발 믿어라. 그래야 내가 산다. 상처 난 곳이 욱신거리며 쓰라렸다. 그렇다고 해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당장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요. 제가 이 복장을 입고 있는 것도 도와드리기 위함이지요.”
“미래에서 온 것은 모르겠고 혀 놀림이 아주 간사하다는 것은 잘 알겠구나.”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고요. 김독자는 속으로 울었다.
“좋다. 한 번 믿어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신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나와 함께 가줘야겠군.”
바로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던 김독자의 입장으로써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요. 당연하죠. 위험분자를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그게 제일 위험한 일이겠지요 라며 맞장구를 치며 앞서 걸어가는 남자를 따랐다.
몇 분 걷지 않아 도착한 곳에는 화려한 궁이 있었다. 와. 진짜로 왕이었어? 입에서는 감탄사가 맴돌 뿐 겉으로 말을 하진 못했다. 왕이 맞기는 한 듯 입궁하자 모든 신하들이 그의 곁으로 거느려졌다. 겉으로는 대단하다며 표현했지만 김독자는 곁으로 눈을 흘겨 도주로를 탐색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도망갈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사람을 꽤나 잘 찾거든.”
입 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비웃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정말 잘생겼다는 말을 빼 놓을 수는 없었다.
“암요. 제가 도망이라니요.”
세상 선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한마디로 무시를 당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김독자였지만 죽고 싶지는 않았다. 군말 없이 그를 따라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를 뒤쫓자 옆에 있던 신하가 막아섰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막지 싶었지만 정답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곳은 왕과 중전만 들어가실 수 있는 방입니다. 아무리 왕께서 모셔 오신 분이라 하더라도 불가합니다.”
“그럼 저는 어디로 가야할까요?”
“저를 따라 오시지요.”
신하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방은 방금 보았던 것보다는 소소했지만 정말로 귀빈을 맞이하는 방인 듯 고가의 물품들로 보이는 장식품이 즐비해 있었다.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던 도중 푸른색이 아름답게 빛나는 옷 한 벌이 준비 되어 있었다.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한 거야? 조금 커 보이는데 입고 나오란 뜻이겠지?’
막상 옷을 입어보자 사이즈가 딱 맞았다. 눈썰미도 좋은 가. 생각을 하며 가만히 방의 이불 위에 풀썩 누웠다. 아. 집 가고 싶다. 신작 발매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회사는..하.. 아무 말 없이 결근이라니 잘리는 거 아니야?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누워있는데 문밖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나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발 방금 만난 싸가지 왕은 아니길 빌고 또 빌었다. 신은 야속하게도 김독자의 편은 아니었다. 아까와는 다른 옷이었지만 여전히 검은 옷임에 틀림이 없었다.
“가야할 곳이 있다.”
한 마디를 하고선 아무런 설명도 없이 왕이란 남자는 김독자의 방을 나갔다. 아니 원래 왕이 저렇게 싸가지 없어? 하면서도 벌떡 일어나 그 남자를 쫒아갔다.
“미천한 소인이 어디로 가는지 여쭈어 보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리 물어도 앞에 걸어가는 남자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저기..”
네 번째 물었을 때 드디어 그의 입이 열렸다. 불쾌하고 귀찮고 짜증남이 가득 묻어나는 음색이었다.
“가보면 알 테니 그만 좀 물어보지. 그 정도 생각도 없는 자인가?”
“아닙니다. 전하. 하하.”
입으론 웃고 있었지만 속에는 열불이 터졌다. 누가 보아도 경직된 웃음이었다.
조용히 뒤따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꽤 잘 꾸며진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면서 보이는 그림들도 하나같이 멋있었다. 특히 밖으로 보이는 연못은 장관이었다. 겨울에 왔으면 정말 아름다웠으리라.
“주상전하 납시오!”
끽해봤자 주변 구경 시켜주려는 거겠지 싶었던 김독자는 눈앞의 남자를 만만하게 봤다고 생각했다. 그 누가 이런 곳에 처음 보는 남자를 데려올까. 정말 간이 부은 남자였다.
따라간 그 곳은 관료들과 정치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 미친 자야!!’
속으로 울부짖었지만 지금 와서 되돌리기엔 늦었다.
“전하.. 그 남자는 도대체..”
“혓바닥이 뱀보다 간사하며. 상황을 판단하는 것은 쥐보다 빠른 남자지.”
눈으로 김독자를 훑으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내 비가 될 사람이다.”
그의 말에 궁 전체가 뒤집어졌다. 무엇보다 김독자 본인이 제일 놀랐다.
‘누구 맘대로?!?!’
말이 안 된다며 통촉하여달라는 신하들의 울부짖음이 울렸다. 딱 보기에도 의견을 굽힐 것 같지 않은 남자는 꿋꿋하게 자신의 소신을 펼쳐 보였다.
“나 유중혁은 이 자가 나의 비라는 것을 확고하게 말하는 바이며 반대를 하는 자는 혓바닥이 잘릴 것이다.”
“하오나 전하..! 그 자는 신원이 불명한 자가 아닙니까..! 어찌 믿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군. 그렇다면 책사로써 능력을 펼쳐 인정을 받는다면 그 무엇도 걸릴게 없단 뜻이겠지.”
“전하..!”
“이만 오늘은 여기서 끝마치도록 하지.”
신하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그를 불러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주변에 사람들이 전부 사라지기까지 입을 떼지 않고 쫒아갈 뿐이었다.
어느 정도 궁을 걸었을 때 유중혁은 알아서 신하를 물렀다.
“그쪽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보지.”
“처음 봤을 때랑 태도가 전혀 딴판인데.”
“그건 내가 살고자 했으니까. 그렇지만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
“무엇이 궁금하지?”
“갑자기 비가 된다는 이야긴 또 뭐고 책사는 또 뭔데.”
“너한테는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지. 푸르른 날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인연인 자가 이 세계에서 강림한다. 그뿐이다.”
“그게 무슨 얼토당토 없는 말이야.”
김독자는 여전히 화가 삭히지 않았는지 시익 대며 화를 내었다.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말은 덤이었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지만 미래에서 왔다는 말을 누가 쉽게 믿을 수 있지?”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미래에서 왔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 나라의 왕이며 백성들을 책임져야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다.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그 무엇도 놓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유중혁은 단호한 의지를 눈빛에 투영했다. 무슨 말을 해도 이자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하아.. 전하.”
“편하게 말해라. 넌 내 사람이니까.”
“그래 중혁아. 네 말대로 내가 너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어 나는 미래에서 왔으니까. 하지만 난 이곳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어.”
“흠. 생각해보니 그렇겠군. 좋아. 이곳에 대한 모든 자료의 열람을 허락하도록 하지.”
“그렇게 쉬운 말이..!”
“그럼 또 뭐가 문제지?”
유중혁은 아직도 더 필요한 게 있냐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애초에 나는 남잔데 비가 될 수 있겠냐고! 말을 해봤자 통하지 않을 상대였다.
“하아.. 아니다. 그래서 어디가면 볼 수 있는데.”
“혼자 보내기엔 걱정스러우니 내 함께 가주도록 하지. 영광인줄 알도록”
“네네, 알겠습니다.”
안내를 받은 곳은 도서관처럼 보이는 서고였다. 생각보다 거리가 있어 꽤 걸었지만 그동안 김독자는 유중혁을 관찰했다. 정말 잘생겼다는 것 말고 꽤나 사소한 버릇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혼자만의 비밀이었지만.
문이 열리고 먼지가 가득한 비밀의 공간이 오픈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서적이 있었다.
“와. 생각보다 많이 있네?”
“그럼 뭐라 생각한 것이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유중혁은 먼저 안으로 이동했다.
“필요해 보이는 것 먼저 대충 들고 올게 잠시만.”
불행 중 다행으로 적혀있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필요해 보이는 서적을 하나씩 집기 시작했다. 나라의 정세에 관한 것 역대 왕에 관한 것 하나 둘 씩 집던 서적은 어느새 김독자의 시야를 가리기에 충분할 정도의 높이까지 쌓였다.
그 순간 발밑에 있던 문턱을 미처 보지 못한 김독자는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아니 쓰러질 뻔 했다.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던 유중혁이 쓰러지는 그를 잡아채었다. 손에 들려있던 서적들은 지면을 향해 추락했지만 김독자는 유중혁의 품안에 안긴 웃긴 꼴이 되었다.
“야, 야.. 이거 놔”
“쓰러질 뻔한 것을 잡아 주었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는 건가?”
“아.. 고마워..”
“별말씀을.”
김독자는 빠르게 유중혁의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그는 언제 잡아주었냐는 듯 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진짜 왜 그러냐. 놀라서 그런가. 붉게 달아오른 볼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대었다.
책을 가져와 읽어도 아까 일어났던 장면이 오버랩 되며 머릿속에선 떠나지 않았다. 김독자 진정해 그냥 잘생긴 것뿐이잖아 심장은 왜 또 두근대고 난리야..!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난 뒤 책상에 앉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책에 집중했다.
나라의 정세는 생각 보다 심각했으며 흥미진진했다. 김독자는 서고에 유중혁과 단 둘이란 생각도 잊은 채 눈앞의 글자들에 집중했다. 적막 속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창창하던 해는 어느새 낮게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지.’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서적을 읽던 김독자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새근새근 숨을 쉬며 잠들어있는 유중혁이 앉아있었다. 와, 진짜 잘생기긴 더럽게 잘생겼네. 내가 이 얼굴로 살았으면 어? 그냥 여자들 다 울리고 다녔을 텐데. 입맛을 다시며 의자를 가지고와 앞에 앉아 하나씩 뜯어보기 시작했다.
굵은 눈썹, 오똑한 콧날, 탐스러운 입술, 날렵한 턱선 이내 김독자의 시선은 유중혁의 입술에서 멈추었다. 1초, 2초, 3초, 해가 저물며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둘의 입술이 점점 가까워 졌다. 입술이 닿기까지는 채 한뼘조차 남지 않았다. 그때 가만히 감겨있던 유중혁의 눈이 뜨여졌다.
“?!?!미..미안!!”
당황하며 떨어지려던 김독자를 유중혁이 잡아챘다. 오히려 한 뼘조차 남지 않은 거리를 더욱 가깝게 좁혔다. 쪽,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서로 닿아있던 시간은 비록 몇 초였지만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김독자는 서둘러 서고를 나섰다. 재빠르게 사라지자 유중혁은 잘 빠진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꽤나 부드럽군.”
미쳤어 김독자. 분명한 거야 미치지 않고서는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 방으로 돌아온 김독자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망에 사로잡혔다.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남자를 좋아하나? 서부터 이건 꿈이 분명해 눈을 감았다 떴다.
‘제발, 눈 뜨면 침대 위여라..’
소망했지만 지켜질리 없었다.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하아. 깊은 한숨을 쉬며 하루를 보냈다.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다.
결국 김독자는 날이 바뀌도록 한숨도 잠들지 못했다. 유중혁의 얼굴을 앞으로 어떻게 봐야 하나 고민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답을 내렸느냐? 그것은 또 아니었다. 생각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유중혁과 입술을 맞추던 그 순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간밤에 잠을 설쳤느냐. 당장 시중을 들던 놈을 잡아 목을 쳐야겠군.”
“어어?! 아냐 다른 거 때문에 그래.”
“집에 돌아가고 싶으냐.”
“아..음 뭐 그렇지.”
적당히 둘러댈 변명이 없기에 그렇다고 대답을 해버렸다. 김독자의 대답을 듣자마자 유중혁은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왜 슬퍼보였을까.
“걱정 말아라. 무슨 일이 있던 내 꼭 돌려보내주도록 하지.”
“어어? 응 고마워.”
분명히 전날까지만 해도 비가 될 자라면서 흉포를 놓고 다녔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담. 고개가 갸웃해졌지만 더 이상 말을 걸 수 없었다.
“주상전하 납시오.”
오늘도 어김없이 불편한 자리에 끌려온 김독자였다. 하루라고는 하지만 꽤 많은 것을 알게 된 그는 더 이상 이들의 말이 아무런 내용도 없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왜 그렇게 해결을 해야 하는가 싶었다.
“전하, 현재 서곡창이 가뭄으로 인해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흠.”
유중혁은 생각을 하는 듯 미간을 꾸겼다. 김독자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을 해줘야 하나 생각했다. 괜히 나서는 게 아닐까. 신하들끼리 열띤 토론을 벌였지만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저기.. 중혁아?”
“이놈! 무엄하다! 어찌 전하의 존엄을 입에 그리 가벼이 올릴 수 있느냐!!”
가장 높아 보이는 대신이 김독자에게 한마디 했지만 유중혁이 막아보였다.
“말해 보거라.”
“그게 문제라면 댐을 건설해서 주변의 수맥을 끌어오면 되는 문제 아니야?”
“그게 그렇게 가볍게 될 리가 없지 않느냐!”
“조용히 하래도. 계속해서 말해 보거라.”
유중혁은 신하를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그것은 운하를 만들면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아무래도 현재 물자가 운송되는 문제도 해결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말이 끝자나 신하들은 저마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냐고 저마다 떠들어댔다. 다들 미심쩍은 눈빛이기는 해도 속으로는 김독자의 능력을 은근 신용하는 듯 했다.
“잘했다.”
유중혁은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다들 전하가 웃었다며 난리를 치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말이다.
“아냐. 나는 오히려 도움이 되어서 좋은 걸”
배시시 웃어보였다. 이 남자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신을 바라보며 따뜻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흡사 연애를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정신 차려라. 이것은 날 좋아해서가 아니라 나라에 도움이 돼서니까.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생각을 떨쳐내고자 하였다.
“무슨 일 있느냐.”
“어? 아무것도 아냐. 혹시 괜찮으면 먼저 돌아가 있어도 될까?”
“이 이후는 우리끼리 논의해도 괜찮을 것 같군. 편한대로 하도록.”
‘우리라. 나는 그 속에 속하지 못한다는 뜻이겠지. 어차피 돌아갈 사람이니까.’
마음이 아파왔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김독자는 단 2일만으로도 사람이 사랑에 빠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왕과 아무것도 없는 일반인이었으니까. 눈물이 차올랐다 이대로 있다간 울 것 같아 서둘러 빠져나왔다.
“응, 먼저 가있을게.”
목이 잠겼지만 무사히 말을 마쳤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잠깐.”
유중혁은 말을 하며 재빠르게 나가는 김독자의 손목을 낚아챘다. 나가기 전까지 울지 않으리라 다짐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갑자기 방향이 전환되며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은 툭하고 선 떨어졌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붙잡힌 손목을 뿌리쳤다.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우는 모습을 보여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어차피 자신은 외지인일 뿐이었다. 슬퍼할 필요가 없었다.
서둘러 돌아온 방은 어떤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다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럼에도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침구에 풀썩 누워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차오르며 눈앞이 흐려졌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난 대체’
자괴감이 머리끝까지 가득 찼다. 처음엔 이 세계에 떨어진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지금은 유중혁을 사랑한다니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뒤따라올 사람은 없는데 누구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들어 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보았다. 예상 밖의 인물이 문이 열린 곳에 서 있었다.
“왜 따라 온 거야.”
“아무 말 하지 마라.”
유중혁은 터벅터벅 걸어왔다. 둘의 얼굴이 가까이 마주치는 거리에 서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뭘 하려고..! 읍..”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남자다. 갑자기 입술을 부딪쳤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인가. 김독자는 혼란에 사로잡혔다.
“푸핫.. 이게 무슨 짓이야.”
“말 그대로.”
“그게 무슨 의민데.”
“그저 네 녀석이 울고 있는 것을 보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뿐이다.”
유중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뚝뚝 떨어지던 눈물은 멈추지 않고 수도꼭지처럼 철철 흐르기 시작했다.
“나쁜 녀석아….흐엉”
“그래, 난 나쁘다.”
“그런데 진짜 잘생겼어….히끅”
“그래, 난 잘생겼다.”
“싸가지도.. 더럽게 없고 진짜로….흡..”
“안다. 그래도 이왕 울 거면 내 품에서 우는 게 어때.”
양 팔을 활짝 벌리고 있는 유중혁에게 조금씩 천천히 다가갔다.
“너 진짜 못됐어.”
“안다.”
단단한 팔이 감싸 안았다.
“미안하게도 난 더 이상 아무것도 놓칠 수 없을 것 같다.”
김독자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
서기 유세기 831년
유중혁은 역대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왕이며 김독자와 목숨이 다 할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