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머언 산골, 깊은 숲속에는 산신이 산다고들 하였다.
  그 산신은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의 모습이며 산에 들어오는 이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였다.
  알음알음 퍼져간 소문은 으레 그렇듯이 정설이 되었고 근처 마을에서는 그 산신을 모시는 사당이 지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 아픈 이들이 생길 때마다 산에 굿을 하고는 했다. 산신은 처음엔 마을 사람들의 작은 믿음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라에 흉년이 들고, 기근이 3년째 계속되자 맹목적으로 변했다. 집집마다 굶는 이들로 가득했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빼곡했다. 배고픈 산짐승들은 마을로 내려와 사람을 물어가곤 하였다. 실로 흉흉한 시기였다. 허기를 참다못한 사람들은 산신이 노하신 게 틀림없다며, 그래서 기근과 호환으로 벌을 주시는 것이라고 부르짖었다. 그 맹목적인 믿음이 결국 광신으로 치달아 몇몇 권력 있는 사람들은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해 첫 제물은 마을 가장 외곽의 낡은 푸줏간에 얹혀살던 여자아이였다.

  유중혁은 분명 그 구미호는 산신 따위가 아니라 사람의 간을 빼먹는 못된 요괴라고 굳게 믿었다. 아니 어찌 산신이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지는 않을망정 흉년을 내리고 사람을 바치라고 한단 말인가? 세상을 험하게 살아온 아이는 어른의 말을 쉬이 믿지 않았다. 분명 구미호가 산신인 척 사람들을 홀려 제 동생의 간을 빼먹으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다른 이들은 몰랐겠지만, 그는 몇 번씩이나 간이 빼먹힌 채 푸줏간에 온 동물들을 목격한 적 있었다. 산짐승들이 가축과 인간을 잡아갈 때 반대로 간이 뽑힌 채 푸줏간에 온 동물들은 명백히 기이했다.

   유중혁은 오늘 아침의 일을 회상했다.

  유미아는 오늘 아침에 마을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깔끔히 단장되었다. 고운 옷과 귀한 음식에 머뭇거리다가도 받아들이던 제 동생과는 다르게 유중혁은 대가 없는 호의에 거부감을 느꼈다. 사람들은 남매를 배불리 먹이고
 나서 잠깐  곳이 있다며 유미아를 데려갔다. 유중혁은 몰래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은 유미아의 볼에 연지곤지까지 정성껏 찍어 발라 가마에 태웠다. 그리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푸줏간에서 칼을 가져왔지만, 칼은 어린 유중혁의 생각보다 묵직했다. 발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유중혁은 칼을 놓지 않았다. 유중혁은 힘겹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푸줏간의 일을 자주 도와주러 오곤 하는 옆집 형을 생각했다. 현성 형은 이 무거운 칼을 들어 고기를 잘도 자르곤 했다. 언젠가 본 그가 칼을 번쩍번쩍 드는 모습을 생각하니 검이 조금 더 들만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유중혁은 계속해서 수풀을 헤치며 산을 올랐다. 산에서 여러 사람들이 가마를 들고 올라간 까닭에 흔적을 찾기는 쉬웠지만, 유중혁의 보폭은 너무 작았다. 성인 남자들의 걸음을 따라잡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괴상한 짐승 울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스락 바스락 바싹 마른 수풀을 헤치는 소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유중혁은 한껏 숨을 죽이고 산길을 헤맸다. 이런 산에 자신의 동생을 두고 갔다간 산짐승의 먹이가 되고  터였다. 유중혁은 푸줏간 창고에서 훔쳐온 묵직한 칼을 두 손으로 꼬옥 잡았다. 작은 몸으로 들기엔 크고 무거워서 땅바닥에 질질 끌렸지만, 그는 산짐승의 귀든 꼬랑지든 보이기만 하면 칼로 당장 썰어버리겠다는 아이치고 상당히 과격한 결심을 다졌다.

  유중혁은
 앞을 가로막는  나무를 돌아갔다. 그러자 그곳은 가시덤불로 수북하게 막혀 있었다. 덤불을 칼로 힘겹게 썰어내고 지나가자  험한 길이 나왔다. 적어도 유중혁이 무거운 칼을 들고 오르기란 어려워 보이는 길이었다. 유중혁은 어쩔 수 없이 왔던 길로 다시 발을 돌렸고, 무서운 울음이 들리는 깊은 숲 속을 피해 비교적 얕은 덩굴을 헤치며 걸었다. 어딘가에서 조그맣게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찌륵거리는 벌레 소리가 선명했다.

  유중혁은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졌음을 깨달았다. 마른 수풀과 나무들이 기이하게 뒤틀려 얽힌 괴물들처럼 보였다. 그는 더럭 겁이나 일부러 거칠게 잔 가지들을 베었다. 마른 잎들이 칼날에 스치는 소리가 터무니없이 컸다. 언제부턴가 작은 물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중혁은 여기가 어딘지 몰랐다.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자 아이의 눈에 공포가 차올랐다. 정신없이 어딘가로 걸어가고는 있었지만 맞는 길인지 확신은 없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어른들을 믿지 않았고, 스스로 유미아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유중혁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달빛이 영롱하게 비치고 있었다. 보름달이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옅은 빛에 의지해서 그는 나아갔다. 흙길이 넓어지고 있었다. 그는 내리막길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넓은 공터가 파리한 빛을 담고 있었다. 반딧불이가 가득했다. 낡고 작은 사당이 그곳에 있었고, 공터에는 낮에 사람들이 유미아를 태웠던 가마가 있었다. 유중혁은 가마로 달려가 작은 문을 벌컥 열었다. 안은 비어 있었다. 온기조차도 없었다.

  유중혁은 순간 다리에 힘이 덜컥 풀리는 걸 느꼈다. 산을 쏘다니느라 지친 다리가 가마 앞에 내던져졌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모양으로 흙이 진하게 물들었다. 꼴사나운 짓이다. 그는
 스스로를 타박했다. 유미아의 시체, 하다못해 소맷자락이라도 찾기 전까지는 그만둘  없었다. 눈물을 소매로 거칠게 닦아낸 그때, 낡은 사당 뒤에서 무엇인가가 부스럭거렸다. 
유중혁은 화들짝 놀라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 잡았다. 두 손으로 손잡이를 꾹 잡고 칼 끝을 낡은 사당으로 겨눴다. 유중혁은 사당 뒤편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사박,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하얀
 남자였다. 피부도 하얗고, 입은 두루마기와 저고리 소매부터 신발까지 모조리 하얬다. 달빛에 비춰져 일견 푸르스름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런 주제에 머리는 또 검어서, 머리 위에 쫑긋 서 있는 세모난 동물의 귀가 눈에 띄었다. 잠깐, 동물의 귀? 끝이 뾰족한 귀가 움찔거렸다. 남자의 눈이 유중혁을 향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어른들의 말이 떠올랐다. 산에는 여우 산신이 산대- 유중혁은 그 말을 듣고 한 자신의 생각도 떠올렸다. 분명 인간을 잡아먹는 구미호일 거야-. 유중혁은 이를 꽉 물었다. 그리고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냅다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나른하게 떠져있던 남자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게 보였다.

   "나쁜 구미호, 죽어라-!"

  다급하게
 달려든  치고 날카로운 유중혁의 공격에 남자는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칼이 허공을 갈랐고 바닥에 푹 박혔다. 유중혁이 끙끙댔지만 박힌 칼은 쉽게 빠지질 않았다. 
어이없다는 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휴, 깜짝이야. 난데없이 달려들고 난리야. 그리고 너, 다짜고짜 왜 나보고 나쁘대?"
   "구미호는 사람을 먹는다!!"

  유중혁은 손잡이에 매달려 칼을 뽑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흙이 들썩들썩거렸다. 조금만 더 하면 빠질 것 같았다. 남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옷을 툭툭 털어낼 뿐 유중혁을 공격할 의사는 없어보였다. 유중혁이 내뱉은 말에 잠깐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내가 그래도 사람을 먹은 적은 없는데. 남자가 억울하게 중얼거렸다. 유중혁은 소리를 질렀다.

   "인간들 간 빼먹으려고 마을 근처에서 살던 거 모를 줄 알았나?"

  설움이 복받쳤다. 분명 유미아는 이미 저 여우에게 잡아먹힌 것이 틀림없었다. 묻어줄 수 조차 없는 것인가. 내가 너무 늦어서. 볼에서 액체가 흘렀다. 분노가 눈물로 흐르고 있었다. 심호흡하고 세게 손잡이를 내리누르자 칼이 뽑혔다. 유중혁은 다시 손잡이를 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남자는 기분이 나쁜 표정이었다.

   "야, 나는 자연산이야. 산의 정기를 오랜 시간 모아 구미호가 된 거라고. 힘에 눈이 멀어서 생간을 씹어먹는 양식산 애들이랑 비교하지말아줄래?"

  으, 하얀 여우 귀를 가진 남자는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쁘다는 듯 진저리쳤다. 유중혁은 그래도 눈을 부리부리 뜨며 여우를 노려보았다. 우느라 붉어졌지만 진한 눈매가 매서웠다. 저 여우가 나를 현혹시키려고 하는군! 유중혁은 칼자루를 다시 쥐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살벌한 눈이구만. 일단 그 칼부터 내려. 너같은 꼬맹이한테는 안 어울리는 험악한 물건이라고."

  둥실, 칼이 유중혁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그렇게 땅에서 뽑아보려고 애쓴 무기가 가볍게 떠오르고 있었다. 유중혁은 비어버린 손과 칼을 번갈아 쳐다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했다. 몇 번 폴짝폴짝 잡아채려 뛰었지만 자루에 손이 닿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유중혁은 더 매서운 눈빛으로 여우를 쳐다보았다. 여우가 움찔했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축 내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건데? 너한텐 이제 아무것도 없어."

  약올리는
 어투였다. 유중혁은 꼬옥 작은 손을 말아쥐었다. 그리고는 남자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그는 가만히 있었다. 유중혁의 작은 손이 하얀 두루마기의 멱을 붙잡는 순간,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유중혁은 빈손으로 휘청거리며 착지했다. 뭐였지 방금?

  여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샐샐 웃고 있었다. 유중혁의 미간의 골이 점점 깊어졌다. 유중혁이 다시 한번 달려들었지만, 남자는 손이 닿는다 싶을 때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흔들리며 흩어졌다. 미치 허깨비 같았다. 몇번 그 짓을 반복하고, 유중혁이 잠시 무릎에 손을 얹고 숨을 돌릴 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조그만 게 진심이긴. 넌 나를 못 잡아."

  확신에 찬 어투였다. 유중혁은 눈가로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역시 구미호에 대한 소문은 과장된 것은 아니었나 보다. 힘들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잡을 수조차 없다니. 순간 유중혁은 옆집 형을 두들기던 맞은편 대장간의
 누나를 떠올렸다. 정희원 누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검이 없으면 맨주먹이라도 휘두르라고. 불 같은 성정의 누나는 웬만한 장정들도 때려눕히는 싸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중혁은 꽉 어금니를 깨물었고, 누나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있는 힘을 다해 손을 휘둘렀다. 남자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날아오는 주먹을 바라보았다. 순간, 유중혁의 손에 푸른 기운이 맺혔고,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 뒤늦게 하얀 손이 주먹을 막으려 움직였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퍽, 하는 타격음과 함께, 남자가 휘청거렸다. 유중혁도 놀라 자신의 주먹을 보며 잠시 굳어 있었다. 다시 힘을 주어 봤지만 아까 봤던 파란 불꽃은 나오지 않았다. 유중혁은 고개를 들었고,
 한쪽 뺨이 붉게 달아오른  노란 안광을 뿜는 눈과 마주했다. 몸이 순간 굳었다. 여우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산에서 범을 마주하면 이런 느낌일까, 아니 그보다 더...
  오금이 저리고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김독자의 얼굴이 숙여졌다. 유중혁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덥석

   "?"
   "와! 너 방금 뭐야? 뭐했어? 어떻게 인간 꼬맹이가 영력을 쓸 줄 알지?"

  남자는 유중혁의 주먹을 두 손으로 모아잡고 붕붕 흔들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꺼졌던 불꽃이 살아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우가 호기심이 많은 생물이었던가. 유중혁은 예전에 사냥을 따라 나갈 때 본 동물도감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앞쪽으로 쫑긋거리는 하얀 귀를 보고있자니 왠지 기분이 별로였다. 이 여우는 유중혁을 진지하게 상대하지 않고 있었다. 유중혁은 손을 강하게 뿌리쳤고, 생각 외로 남자가 세게 잡고 있지 않았던 까닭에 뒤로 벌렁 나동그라질 뻔했다. 두어걸음 뒷걸음치면서 간신히 균형을 잡으니, 남자가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마치 아까의 살벌한 분위기는 전부 거짓말인 것 같았다.

  유중혁은 주먹을 다시 쥐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유중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긴 소매가 팔을 타고 스르륵 미끄러졌다. 가는 팔목이 투명하게 달빛에 비쳤다. 얇고 긴 손가락이 전부 펴지고, 손톱이 남자의 뒤편에 뜬 달을 약간 가렸다. 유중혁의 눈동자에 달과 남자가 하얗게 가득 찼다.

   "알았어, 네 얘기를 들어볼게. 하지만 뭐든 간에, 난 사람의 간을 먹지 않아!"

  남자의 귀가 쫑긋 섰다. 아홉 꼬리가 좌우로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약간 억울해 보였다. 유중혁은 질문했다.

   "그럼 동물의 간은?"
   "그건 내가 먹은 게 아니야"
   "그럼 누가 먹었다는 건가"
   "나 말고 다른 여우!"

  본격적으로
 사람 해치는 데엔 위험이 있다는  알아. 그래서 산짐승만 노리지. 지나치게 신중해서 아직도 못 잡고 있는 놈이 있어. 여우 남자는 툴툴거렸다. 유중혁은 아직도 남자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맨손인 자신을 해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제가 생각하는 그런 야만적인 여우는 아닐 수도 있겠다고 결론지었다. 게다가 무기도 없어 지금 당장 공격할 수도 없는 마당이었다. 유중혁은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 보았다. 아까 피어오르던 기운은 거짓말이라는 듯 평범한 아이의 손이었다.

  여우남자는 공격할 의사도 없어 보였지만 유중혁에게 칼을 돌려주지도 않았다. 귀여운 얼굴에 안맞는 살벌한 무기라고 헛소리를 했던 것도 같다. 유중혁은 이제 남자를 무시하고 가마를
 살펴보았다혹시 피라도 묻어있을까산짐승이 물어가기라도 했을까. 그는 아직 유미아가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가마 안쪽까지 샅샅이 살펴보는 그의 모습에,남자가 말을 걸었다.

   "뭘 그렇게 찾는 거야?"

  유중혁은 대꾸하지 않고 가마의 방석을 들추어 보았다.

   "거기 있던 인간? 흐음....아무래도 이거랑 비슷한 냄새가 나는데...."

  네가 여기 인간이 있었다는  어떻게 알아유중혁은 가마에서 급하게 빠져나왔다남자의 손에 비녀가 들려 있었다오늘 아침에 사람들이 유미아의 머리를 쪽지어주던 그 붉은빛의 비녀였다.

   "역시 네가....."
   "? 응? 으악! 아니야 아니야!!"

  남자가 질겁하며 유중혁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유중혁도 자신의 손을 보았다. 다시 그 푸른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잘됐군. 저녀석을 두들겨 패고 대답을 들어야겠어. 유중혁은 머리가 울리는 것을 느꼈다. 세상이 새파랗게 보이고 있었다. 남자가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그냥.....!!....주...."

  손을 뻗었다. 공중에 둥둥 떠있던 칼이 유중혁의 손으로 날아왔다. 잡은 칼은 그전만큼 무겁지 않았다. 아까보다 안정적인 자세를 잡고 김독자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뭔가 결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퍽, 얼얼해지는 뒤통수와 흐릿해지는 시야. 손에 들린 검이 다시 무게를 찾고 있었다. 뎅그렁. 소리가 울리고 유중혁은 바닥이 코앞으로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덜컥 몸이 멈추고 남자의 팔이 허리를 감았다. 남자가 유중혁을 뒤에서 잡고 중얼거렸다.

   "에이씨 이젠 나도 모르겠다"

  남자가 어깨에 유중혁을 둘러매었다. 몸이 높게 들려 흔들리는 것을 느끼면서 유중혁은 눈을 감았다.



                                                                                                                           ***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울려 퍼졌다.

  짚을 쌓아 놓은 게 전부인 유중혁의 푸줏간 침실에서 듣는 것보다 맑고 컸다.
  눈을
 깜박이자 처음보는 장면이 들어왔다. 동굴이었다. 담쟁이덩굴이 가득 자라난 동굴. 새벽에 잠깐 비가 왔는지 바깥에 자그마한 웅덩이들이 생겨 있었고 담쟁이 잎에 맺힌 이슬이 또옥, 떨어져 웅덩이에 퐁 소리를 내며 파문을 그렸다. 차가운 아침 산바람이 불어왔다. 하지만 그리 춥지는 않았다. 등 뒤가 따끈따끈했다. 만져보니 하얗고 푹신한 털이었다. 털의 출처에 대해 고민하니 어제의 기억이 한번에 몰아치듯 떠올랐다. 유중혁은 튕겨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동굴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깥의 담쟁이 잎에서 물이 한번 더 떨어졌고, 물방울 소리가 빈 동굴을 울렸다.

  주변을 보니 서책이 가득했다. 몇 권은 펼쳐진 채 바닥에 흐트러져 있었다. < 인간의 식습관 > < 당신도 할 수 있다 무공 고수 > < 단전에서부터 기를 다루는 법 > < 폭력적인 아이의 특성과 올바른 대처 >
 같이 의도를   없는 내용들이었다이런  여우가 읽는다고? 취향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겉에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은 책이 있었다. 사람과 동물을 해치는 여우에 대한 내용이었다. 행적과 사건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고, 꾹꾹 눌러쓴 글씨였다. '빠른 시일 내로 마을 습격예상' 이라고 밑줄이 좍 그어져 있었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진짜 나쁜 놈, 하는 낙서들도 간간히 보였다.

  그때 바깥에서 풀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유중혁은 공책을 빠르게 덮고 책장에 숨어 동굴 입구를 바라보았다. 풀숲이 사각사각 흔들리더니 하얀 귀가 튀어나왔다. 쫑긋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유중혁은 기묘한 안도감이 드는 것을 느끼다가, 다시 몸을 긴장시켰다. 어제 미아의 비녀를 가지고 있던 놈이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쉽게도 무기로 쓸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이제 풀숲을 벗어나 동굴로 들어오고 있었다. 손에는 두꺼운 잔가지들이 들려있었다. 그는 입구에 그것을 와르륵 쏟아두었다.

   "거기 숨어서 뭐해? 어서 나와, 춥잖아"

  움찔, 콕 집어서 말하는 어투에 유중혁은 슬그머니 책장 뒤편에서 나왔다. 들킨 이상 기습은 의미가 없었다. 녀석은 이쪽을 보지도 않고 가지들을 겹쳐 쌓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겹치고 그 사이로 훅 숨을 불었다. 화르륵 가지에 푸른 불꽃이 붙더니 이내 빨갛게 타닥거리며 타올랐다. 유중혁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새벽에 잠깐 비가 와서 추워, 난 괜찮지만 인간은 털이 없으니까"

  그 말이 맞는 듯 잠자리의 열기가 사라지자 오슬오슬 몸이 떨려왔다. 녀석이 꼬리로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들겼다. 유중혁은 제안을 무시하고 녀석과 가장 멀찍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 결과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유중혁은 불을 멍하게 바라보는 그를 힐끔 쳐다보곤 물었다.

   "내가 거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여우는 자신의 코를 툭툭 두드렸다. 귀가 쫑긋거렸다. 하얀 꼬리가 부드럽게 살랑이고 있었다. 아홉 개나 되었다. 유중혁은 남자의 꼬리를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한 유중혁이 제스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남자가 타박하는 어투로 대답했다.

   "냄새가 나잖아, 바보야."

  아, 유중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여우였다. 인간으로 보여도 인간이 아니었다. 꼬리와 귀가 있는데도 생긴 게 인간이니 착각이라도 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어제 밤의 일련의 사건이 약간 이해가 되었다.
  유중혁은 또 질문했다.

   "그 비녀는 어디서 났나"
   "길가다 주웠어"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응. 유중혁은 뻔뻔한 대답에 남자를 살벌하게 흘겨보았고, 남자는 뭐 어쩌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귀가 즐거운 것처럼 활발하게 쫑긋거렸다.

   "진짜야, 거기서 널 만나기 전에 주웠어"
   ".....다른 이들은 없었나"  
   "음, 성인 남자 발자국이랑 냄새가 여러 개? 잔뜩 흥분한 냄새가 났어. 아무래도 여자애가 도망쳐서 쫓아간 것 같아"

  그래서 걘 누군데? 여러 질문에 답변을 해줬으니, 이제 너도 답변을 내놓으라는 듯 남자가 내려다보았다. 모닥불이 일렁거렸다. 남자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춤췄다.

   "내 여동생이다."
   "헤엑"

  어쩐지 비슷한 냄새가 나더라. 알면서 방금 소리는 뭔가. 놀랄 타이밍인 것 같았어. 남자는 시덥잖은 소리를 하며 웃었다. 유중혁은 눈썹을 모았다. 남자는 지나치게 태평해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빨리 찾아야 한다, 산에서 무슨 변을 당할지 몰라"
   "왠지 그럴 것 같아서 산짐승들한테 얘기해 뒀어. 발견하면 데려올거야."

  근데
 비가 와서 시간이  걸린대. 여우는 가늘게 눈을 뜨고 자기의 꼬리를 매만졌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꼬리는 마치 다른 자아를 가진 것 마냥 남자의 무릎을 살포시 감쌌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하얀 꼬리를 빗어내렸다. 하얀 모래가 갈라졌다가 돌아오듯이 엉키는 것 없이 손가락이 빠져나왔다. 털 몇 가닥이 붙어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몇번 반복하더니 제법 커진 털을 뭉쳐 바아앗, 이상한 목소리를 내며 가지고 놀았다. 통통거리며 떠다니는 것이 제법 눈길을 끌었다. 성인 남자의 형상을 한 여우가 귀여운 목소리를 내며 털뭉치를 가지고 노는 것은 분명 흔히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손으로 툭툭 치다가 입바람을 불고, 어제 유중혁의 칼에게 한 것처럼 그냥 공중에 띄워 놓기도 했다. 그리고 이내 질렸는지 유중혁이 일어난 침대에 털뭉치를 푹 꽂아넣었다. 유중혁은 순간 당황했다. 저게 다 네 털인가? 응. 그는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간단하게 대답하고 다시 다른 꼬리를 빗어내리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그 일련의 과정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여우 남자는 여러가지 산나물을 가져와 유중혁에게 주었다. 칡뿌리는 유중혁도 자주 먹던 거라 그럭저럭 먹을 만 했지만, 그가 가져온 말라 비틀어진 참나리 구근은 도저히 먹을 만한 거라 부를 수 없었다. 쑥과 미나리와 잡초가 가득 섞인 풀은 멀쩡한 조리도구가 없이 그냥 먹기엔 어려울 것 같았다. 게다가 무슨 버섯은 이렇게 아무거나 따 왔는지. 유중혁은 한숨을 쉬고는 신중하게 먹어도 될 버섯과 먹으면 안 될 버섯을 골라내었다. 여우 남자는 쪼그려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냥 아무거나 먹으면 안되는거야? 넌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죽는다. 무덤덤하게 말한 유중혁의 말에 여우 남자가 더 놀란 것 같았다. 인간은 약하구나..... 속 터지는 말을 내뱉은 그가 꼬리를 방석 삼아 털썩 앉았다.

   "근데 넌 그걸 다 구별할 줄 알아? 대단한데?"

  유중혁은 송이버섯을 나뭇가지에 꽂아 불에 가까이 댔다. 익어가는 버섯이 노릇한 빛깔과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유중혁은 눈을 반짝이는 여우를 한번 쳐다보았다

   "먹어보겠나?"
   "음....아냐, 궁금하긴 한데"

  네가 더 많이 먹어야지, 난 어른이고 넌 아이잖아!
  말해놓고 뿌듯해 하는 그 모습에 유중혁은 그냥 익은 버섯을 남자의 입에 넣어버렸다. 아뜨뜨. 남자가 깜짝놀라며 손을 파닥거렸다.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그 꼴이 퍽 우스웠다. 유중혁은 마음이 괜히 상쾌해지는 걸 느끼며 다음 버섯을 꽂아 구웠다.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남자가 버섯을 문 채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어 잉우어 으언 어이."
   "먼저 놀린 건 너다"

  꿀꺽. 남자가 버섯을 목구멍으로 급하게 삼켰다. 아직도 혓바닥이 얼얼한 듯 혀를 살짝 내밀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놀린 거야! 사실이지. 꼬맹이가....."
   "꼬맹이 아니다."
   "이리봐도 저리봐도 그렇게 보이거든요?"
   "아니라고 했다"
   "애니래고 해따~~~"

  티격태격대는 아침 식사가 끝나고, 김독자와 유중혁은 모닥불 옆에 함께 널브러졌다. 남자의 꼬리가 눈 앞에서 성가시게 살랑거렸고, 유중혁은 무의식중에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남자는 움찔 했지만 이내 가만히 있었다. 보들보들한게 푸줏간에서 만져본 어떤 가죽보다 좋은 감촉이었다. 아까 남자가 한 것처럼 손가락으로 가볍게 긁어내리자, 남자가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며 고롱거렸다. 뭔가 마을의 고양이가 생각나는 반응에 손을 좀 더 섬세하게 움직이자 남자의 귀가 앞뒤로 까닥까닥 움직였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은 생각 외로 재미있는 일이였다. 여기를 만지면 무슨 느낌일까, 자신에게 없는 기관을 만져보고 반응을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남자는 눈을 감고 편안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계속 쓰다듬어 주면 잠이 들 것 같은 얼굴이었다. 유중혁은 마을에서 찾을 수 없었던 편안함을 남자의 곁에서 느꼈다.

  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아마 깜박 존 것 같았다. 유중혁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해가 중천이었고, 물웅덩이들은 거의 말라 있었다. 담쟁이 잎에는 아침에 맺혔던 이슬 대신 햇살이 걸려 있었다. 미시(1시에서 3시 사이)쯤 되었을까. 푸줏간 창고에서 쪽잠을 자던 아이는 제가 낯선 곳에서 마음을 놓았다는 사실에 당황해 했다. 일어나려는 유중혁의 허리에 스르륵 하고 하얀 족제비 같은 꼬리가 감겼다. 옆에 누워있던 남자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아침에 비가 와서 아직 땅이 미끄러워. 너 같은 꼬마가 내려가기엔 위험할 거야."  
   "꼬마 아니다."

  유중혁은 어차피 유미아를 찾기 전까진 산을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비가 완전히 마른 뒤 산을 헤집으면 되는 일이었다. 유중혁의 퉁명스런 대답에 여우는 좋을 대로 하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이번에 약간 비가 와서 다행이네."
   "네가 인간들 걱정도 하는 건가, 여우 주제에."

  그는 유중혁의 말에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

   "여우 여우 하지마, 이래봬도 김독자란 이름이 있단 말이야."
   "여우도 이름이 있나?"
   "아니, 예전에 만난 인간이 지어준거야."

  그러고
 대답한 그는 과거를 회상하는  보였다. 유중혁은 그가 자신보다 오래 살아왔음을,  전에도 다른 인간을 만났음을   있었다. 괜히 기분이 나빴다. 여우, 그러니까 본인이 김독자라고 말하는 그 남자는 왜 자신을 굴에 데려온 것일까. 유중혁은 궁금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김독자와 유중혁의 분위기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을 무렵, 유중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독자가 어딜 가냐 물었고, 유중혁은 유미아를 찾으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냥 기다려. 산짐승들이 찾아다 줄 거야."

  그는 게으르게 바닥에 엎드려 꼬리를 살랑였다. 유중혁이 열심히 만져 맨들맨들해진 꼬리에 윤기가 흘렀다.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나는 유미아를 빨리 찾아야 한다."

  유중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김독자는 잔뜩 귀찮은 표정을 짓더니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여우가 손가락을 살짝 흔들자 책장에 기대어진 유중혁의 칼이 나타났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와-
  유중혁은 알겠다고 대답하곤 동굴입구를 나섰다.

  김독자가
 산짐승들에게 말해뒀다고 하니  속이 이전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유중혁은 무거운 칼을 들어 축축해진 풀숲을 헤쳤다. 어제보다 밝은  속에서 그는 밤에 본 공터를 다시 찾을  있었다. 가마 주변에는 어두워서 보지 못한 발자국의 흔적이 어지럽게 있었다. 그는  중에서도 가장 작게 찍힌 발자국을 추적했다비가 와 옅어지고 없어진 부분도 있었지만 유중혁의 집요한 눈썰미는 귀신같이 발자국을 추적했다. 땅만 보고 다닌지 얼마나 지났을까, 유중혁은 발자국의 끝에 다다를 수있었고, 큰 나무 밑에서 장시간 머무르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 듯 넓어지는 보폭을 발견했다. 그들이 유미아를 다시 찾아낸 건가? 그렇다기엔 다른 발자국들이 없었다. 그 순간 숲 멀리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고 유중혁은 퍼뜩 고개를 들고 그쪽으로 뛰었다.

  유미아의 발자국이 끊긴 시점에서, 유중혁은 소리의 진원지를 잊어버렸다.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직 주변은 밝았지만 금방 어두워질 것이었다. 유미아를 빨리 찾아야 했다. 그는
 어린 여자아이가 갈 만한 곳을 샅샅이 뒤졌다. 한 말라비틀어진 고목 뿌리 부근에서 유중혁은 흙을 무언가로 민 듯한 부자연스러운 자국을 찾았다. 그 자국은 고목과 다른 고목이 겹쳐 만들어진 공간으로 이어져 있었다. 잔 가지들로 절묘하게 가려져 있는 나무구멍 입구였다. 유중혁은 살며시 가지를 치웠고, 입을 막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유미아의 눈과 마주할 수 있었다. 유미아의 눈이 커졌고, 이내 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오르며 유중혁을 와락 안아왔다.

   "으허엉~~~ 오라버니~~~!!"
   "그래그래, 나야."

  유중혁은 꺽꺽거리며 숨이 넘어갈  우는 유미아의 등을 쓸어주었다.  깊은 산속에서 밥도  먹고, 어두운 밤을 보내며 쫓기기까지 했을 유미아를 생각하니 울컥 무언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이제 집에 돌아가야지. 집에 돌아가서 맛있는 것 잔뜩 해줄게. 유중혁은 유미아를 토닥거리며 위로의 말을 중얼거렸다. 잔뜩 긴장하고 뭉친 마음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으흥? 계집애를 쫓아왔는데 사내애 냄새가 나네?"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미아와 유중혁은 동시에 합 숨을 들이마셨다. 입을 꾹 다물고 서로를 쳐다보았다.누군가 아직 근처에 있었다. 유중혁은 소리가 난 곳을 둘러보았다. 잔 가지에 가려진 시야 사이로 사람의 발과 꼬리가 살짝 보였다. 하지만 김독자는 아니였다. 목소리는 잔뜩 간드러졌으며, 발톱이 길고 잔뜩 더러워진 맨발에 갈색 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유중혁은 유미아를 나무 구멍으로 밀어넣고, 본인도 최대한 깊숙히 들어가 쪼그려 앉았다. 칼을 꾸욱 쥐었다. 맨발이라 그런지 발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고 스륵이며 꼬리가 어딘가에 스치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가 유중혁을 긴장시켰다. 유미아가 뒤에서 유중혁의 어깨를 꾸욱 잡았다.

   "게다가.....냄새도......아주 달콤하고 말이야....."

  킁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중혁은 숨도 쉬지 않았다. 냄새, 그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저 되는대로 몸을 밀어넣고, 유미아를 할 수 있는 만큼 몸으로 가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현성 형은 항상 그랬다. 네게 소중한 사람을 최우선으로 지켜야 한다고. 유중혁은 그 가르침을 떠올렸다. 유중혁은 유미아를 지켜야했다.

   "어디로 갔을까???"

  깔깔깔. 냄비를 긁는 것처럼 높은 톤의 웃음이 귀에 박혔다. 본격적으로 근처를 뒤지는 발소리에, 유중혁과 유미아는 서로의 몸을 꼭 붙였다. 유중혁은 이를 꽉 물었다. 뱀이 기어다니는 것처럼 가볍게 스륵스륵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고, 유미아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유중혁의 어깨가 아팠다. 뚝 멈춰진 스치는 소리. 숲의 벌레 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유중혁의 목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유미아의 공포 어린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앞을 가리던 가지들이 후두둑 떨어지고 유중혁은 시뻘건 눈을 한 구미호를 볼 수 있었다.

   "찾았-다!"

  구미호의 긴 혀가 입술 밖으로 비죽 삐져나왔다. 입맛을 다시는 것 같았다. 입술 새로 비친 날카로운 송곳니에 유중혁은 숨을 들이쉬었다. 덜컥 목구멍에 호흡이 걸렸다. 유미아가 바람 새는 소리를 흘렸다. 으아...아.... 남매의 눈 앞에 나타난 구미호는 악귀같은 생김새였다. 귀는 검댕이 묻고 찢겨져 있었으며 단장 따위 하지 않는 듯 흙먼지가 잔뜩 묻은 꼬리는 더러웠다. 잔뜩 째진 핏빛 눈이 식욕과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저것이 포식자임을 알아차렸다.

   "어머, 이 꼬맹이는 냄새가 아주 좋네?"

  그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유중혁은 정신을 차렸다. 여우가 긴 손톱으로 자신의 볼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아주 진한 영혼의 냄새야...."

  그리워지는 걸. 여우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몸을 떨었다. 유중혁은 정신을 차리고 여우에게 칼을 휘둘렀다. 채앵! 온 힘을 다한 공격이 여우의 손톱에 너무 쉽게 막혔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유미아! 도망쳐! 잠깐 머뭇거리던 유미아가 그대로 멀리 뛰어갔다. 유중혁을 계속해서 쳐다보는 눈에 눈물이 흩어졌다. 칼이 점점 유중혁의 몸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유중혁은 밀려나는 다리에 힘을 주며 여우를 노려보았다. 여우가 눈을 접으며 웃고 있었다. 피처럼 빨간 입술이 움직였다. 혈향이 났다.

   "게다가 야들야들한 어린 아이라니!"

  주변에 어른들도 없잖아? 여우는 유중혁에게 점점 다가왔다. 유중혁은 주춤 물러났다. 나무구멍 안쪽에 기대어 더 물러날 곳도 없었다. 결국 강하게 밀쳐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유중혁은 흙먼지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올려다보았다. 여우의 손톱이 요사스런 빛을 반사했다.

   "잘 먹겠습니다~"

  이대로 끝인건가.

  그때 푸른 빛이 확 퍼졌다. 온통 붉었던 분위기가 서늘하게 되돌아왔다. 눈앞에 펄럭이는 흰 두루마기가 시야를 가렸다. 숨통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어두운 밤이 다시 하얀 달빛으로 가득 찼다. 김독자가 유중혁이 이전에 듣지 못한 음성으로 말했다.

   "감히- 내 산에서 겁도 없이"

  붉은 여우는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성가시다는 듯 김독자를 찡그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여우가 손톱을 핥았다.

   "네 산은 무슨 얼어죽을, 다 죽어가는 산 지켜서 뭐하게?"
   "닥쳐라, 천박한 것. 그동안 동물들을 해친 게 너냐?"
   "배가 너무 고파서 간 좀 빼먹었을 뿐이야"

  인간들은 너무 경계가 심하더라고. 여우가 푸념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인간 아이로 호강하나 했더니, 네가 초를 쳐버릴 줄이야. 눈치도 없어라"
   "각오는 되었겠지"

  어머 무서워라- 여우가 유난스럽게 부산을 떨었다. 김독자는 선명한 노란 눈으로 여우를 노려보았다. 공기가 묵직해진 느낌이 들었다. 부드럽게 감돌던 달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김독자의 눈에 푸른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여우는 잠깐 시선을 마주하다가 이내 꼬리를 내렸다.

   "내가 너랑 싸워서 득 될게 뭐가 있겠어? 흥, 나중에 봐"

  여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흔적도 남기지 않는 몸놀림이었다. 유중혁은 다리에 힘이 풀린 채 그저 앉아 있었다. 김독자는 여우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다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푸르게 주위를 압도하던 공기가 가벼워졌다. 찌륵거리는 벌레 울음소리가 다시 들리고, 유중혁은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긴장한 심장이 마구 뛰는 게 이제야 느껴졌다. 김독자가 몸을 숙여 유중혁을 내려다 보았다. 그가 매우 크게 보였다. 어느새 하늘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밝게 떠올라 있었다.

   "내가 해 지기 전에는 돌아오라고 했잖아-"

  타박하는 어투였다. 유중혁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유미아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유중혁은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미아가 저편 수풀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유중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 죽을 뻔 했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얼굴을 다시 올려다 보았다. 아까의 압도하는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었지만, 밤하늘을 등진 모습이 신성해 보였다. 걱정스럽게 유중혁을 바라보는 눈빛이 별처럼 빛났다. 유중혁은 그가 정말 산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미아가 뽀르르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유중혁과 김독자를 힐끔힐끔 번갈아가며 보았다.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김독자는 표정을 유하게 풀고는 유미아의 머리에 손을 얹고 쓰다듬었다. 유미아가 순간 굳었다.

   "네가 얘 동생이구나? 얘기 많이 들었어"

  머리에
 얹힌 손이 쓱쓱 결을 따라 움직였다. 비녀가 풀리고 뛰어다니느라 엉망이  머리가 가라앉았다. 김독자의 소매에서 유미아의 비녀가 나타났다. 유미아는 잠깐 머리를 만지작 거리다가 비녀를 낚아챘다. 눈치를 보다 감사합니다, 라고 중얼거리고 후다닥 유중혁의 뒤로 숨었다. 그래, 저 남자가 지나치게 스스럼 없지. 유중혁은 유미아가 제 등 옷자락을 꾹 잡는걸 느끼면서 서로를 소개했다. 유미아, 이쪽은 김독자. 김독자, 이쪽은 내 동생 유미아다. 너한테 지겹도록 들어서 이미 알아. 김독자가 퉁명스럽게 맞받아쳤다. 하여튼 져 주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찾아서 다행이네. 미아야, 네 오빠가 너 없이는 아주 죽네사네 말도 아니었어."
   " ....정말요?"
   "당연하지!"

  유중혁은 대화하는 둘을 바라보았다. 무릎에 손을 짚고 환하게 웃는 김독자와 손을 꼬물거리며 아직 어색한 표정으로 김독자를 올려다보는 유미아. 낯선 풍경이었다. 그는 어제 아침에 꼼짝없이 여우의 산 제물로 바쳐질 뻔한 유미아를 떠올렸다. 김독자는 그런 제물을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산 제물을 바치면 산신이 노여움을 풀고 흉년을 끝내줄 거라고 믿는 듯 했다. 김독자는 왠지 그럴 능력이 있을 것 같았다. 나물 고르는 실력은 형편없지만, 자신을 구해주던 등은 대보름날 보름달만큼 커 보였으니까.

  유중혁은 슬쩍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었다. 그리고 떠드는 김독자에게 다가갔다. 김독자가 두루마기가 당겨지는 감각에 유중혁 쪽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
   "김독자.....우리는 이제 집으로 가야 한다."

  본인이 말하면서도 울컥이는 감정에 유중혁은 두루마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꼴사납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깐 멈칫하고 이내 쪼그려 앉아 긴 소매로 유중혁의
 눈물을 닦아주는 김독자의,  다정함이 너무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이 온기를 위해서라면 가끔씩은 꼴사나워도 괜찮을 것 같았다. 김독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부드럽게 유중혁의 눈가를 문질렀다.

   "처음 만났을 때도 울고있더니....완전 울보네"

  울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먹먹해진 목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처음 느껴본 깊은 애정이 목구멍 깊숙이 스며든 것 같았다. 유중혁은 잔뜩 빨개진 눈가로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유중혁은 고개를 홱 돌렸다. 딸꾹질이 나왔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고 숨을 억눌렀다.

   "히끅.....마을이....잠잠해지면....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지금 당장 돌아갈 수는 없지만....."
   "왜 돌아갈 수 없어?"
   "유미아는 마을 사람들이 산신에게....히끅, 바친 산제물이다. 내가 동생과 함께 내려가면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겠지..."
   "산신에게 제물을 왜 바쳐?"

  김독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면서도 진정하라며 유중혁의 등을 쓸어주었다. 유중혁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흉년이 크게 들었다. 너도 알겠지만.... 히끅, 마을 사람들 모두가 굶고 괴로워했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이 점점 서로를 미워했다. 예전에는 그들이 베푸는 것으로 먹고 잘 수 있었지만....그들이 배고픔에 허덕이자 제일 먼저 내쫓기게 되었다"

  그들의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호의를 베풀기 어려워졌을 뿐이다. 유중혁의 딸꾹질이 잦아들고 있었다. 김독자는 조용히 그 말을 들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는 김독자가 인외의 존재임이 크게 다가왔다. 푸른 기 일렁이는 눈을 바라보며 유중혁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소원을 내뱉었다.

   "마을이....예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흉년이 끝나고 다시 서로 웃고 떠들던 그때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들이 행복해지면 좋겠다"

  그는 친절했던 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유중혁의 울음이 마침내 멎었다. 여전히 눈가는 짓물러 붉었지만, 선명하게 눈을 뜨고 김독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아이가 산신에게 소원을
 말하고 있었다. 눈빛이 곧았다. 사람들에게 내몰린 아이가 사람들의 안녕을 바라고 있었다. 그 아이의 눈에 비친 사람들이 누구였던지 간에, 김독자는 그들이  부럽다고 느꼈다. 그리고 유중혁과 함께 산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이뤄질 리 없다는 것도 알았다. 사람의 아이는 사람과 살아야 했다.

   "너는 지금 마을로 내려가도 돼."

  네 소원은 이뤄질거야. 김독자는 유중혁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유중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김독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 아이도 이렇게 굳은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데, 산신이라고 떠받들여지는 나란 녀석은.

  사실 김독자는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전지전능한 산신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그냥 기적을 좀 부릴 줄 아는 강한 영물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도 아주 옛날 어릴적 저 마을에서 귀여움을 받고 살았고, 산짐승들을 위해 먹을 것을 흔쾌히 남겨주던 그들의 인심을 기억했다. 그러나 힘이 생기고 나니 그들의 고통을 회피하는 자신만이 남았다. 힘이 생기니 상실의 공포도 커졌다. 점점 꼬리의 갯수가 늘어날수록 영력을 잃기 싫다는 이유로 은혜를 입은 그들 후손의 고통을 무시하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이래서야 내가 다른 탐욕스런 여우들과 다를 게 뭔가. 김독자는 자신이 위선자라고 생각했다.

  김독자는 회상했다. 심지어 그는 그가 어린 여우였을 시절, 이름을 지어준 선비를 기억했다. 매일 과거 시험에 낙방해 이 산을 자주 오고 다녔지만 마음만은 올곧던 선비. 아마 성이 죽일 유자였던가. 지나다니는 길에 김독자를 발견해 먹이를 챙겨주며 가끔씩 말동무가 되곤 하였다. 그러나 이 길을 다니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에 토라져 나는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했었었다. 선비는 하하하 크게 웃고는 그럼 독자로구나. 김독자. 라고 이야기했다. 김독자? 왜 김씨냐고 묻자. 네 눈동자가 금과 같으니, 김씨를 붙였다. 하고 웃던 남자를 기억한다.

  바보같이. 그때 보내기 싫었다고,
  난 시간이 견딜 수 없을만큼 많고
  그 많은 시간이 대부분 혼자여도 좋으니
  가끔씩이라도 찾아와 달라고 했어야 했는데.

  김독자는
 우울해졌다. 과거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이별은 확실히 좋은 것은 아니었다. 다음에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다는 점에서, 김독자는 가봐야 한다는 말이 싫었다. 그래서, 오긴 할거야? 김독자는 괜히 퉁명스럽게 유중혁에게 틱틱거렸다. 유중혁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독자, 내 이름은 유중혁이다. 이 산에서 기다려라, 나중에 꼭 너를 다시 찾겠다."

  유중혁이 다짐하듯 김독자의 두루마기를 세게 쥐고 놓았다. 김독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이 꼬마의 이름도 유중혁이었다. 그 선비와 같은 성씨를 쓰려나, 하지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유중혁이 김독자에게 약속해 주었다. 찾아오겠다고. 김독자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보답했다. 유중혁이 순간 멈칫했다. 너무 속보였나? 김독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얼굴을 가렸다. 유중혁의 시선이 손바닥을 뚫고 전해지는 듯 했다.

  김독자는 두 아이를 안전한 산길로 내려보냈다. 유중혁은 유미아의 손을 꼭 잡고 내려가면서도 김독자를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김독자는 여우구슬을
 입 안에서 꺼냈다. 푸르스름한 빛나는 안개가 구슬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김독자는 구슬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채 천년을 채우지 못한 영력이 구슬에 담겨 있었다. 그는 숨을 불었고, 파란 별가루가 구슬 속에서 흩어져 나와 자기들끼리 뭉치더니 푸른 안개를 만들어냈다. 뭉게뭉게 몸을 부풀리던 안개는 커지고 서로 부딪치며 큰 비구름이 되었고, 서서히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검은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 보름달을 가리고 있었다. 하늘을 뒤덮은 구름 안에서 푸른 번개가 번쩍이더니 이내 툭 툭 물방울이 떨어지며 비가 내렸다.


  쏴아아아아아아아-

  김독자는 빗물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탐스럽던 하얀 꼬리가 스르륵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유중혁은 산 밑에 도착했다. 김독자가 알려준 길은 생각보다 훨씬 산을 빠르게 내려오도록 도와주었다. 유미아의 손을 잡고 두리번거리던 그는 이제 어디로 갈지 고민했다. 이전에 그를
 맡아주던 푸줏간 아저씨께는 다시   없었고, 산을 헤집고 다니느라 더러워진 칼만 조용히 창고에 내려놓고 나왔다. 나중에 대장간 누나가 다시  갈아주던가  거다. 아니면 푸줏간 도우미 형이 손질해놓거나. 그런데 밖으로 나오자마자 갑자기 엄청난 비가 내렸고 그들은 마을 외곽에 있는 다 쓰러진 폐가 지붕 밑으로 피신했다. 두둑두둑거리며 처마를 두드리는 빗방울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비가 조금씩 새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폐가 안쪽이 끼익거리더니 사람의 인형이 튀어나왔다. 유중혁은 유미아를 감싸고 몸을 움츠렸지만 저쪽은 이미 그들 남매를 발견한 것 같았다.

   "어, 뭐야! 유중혁 아니야?"
   "엥 그리고 유미아도 있네?"
   "?? 산에서 실종됐다고 들었는데"

  유중혁은 어두운 시야와 빗방울 사이에서 그들을 알아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지혜와 한수영, 김남운이었다. 여기에는 왜..... 폐가 탐험이라도 하려던 건가. 유중혁은 그들을 희미하게 노려보았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뭐라 쑥덕거리더니 그들의 팔을 턱 잡았다.

   "뭐해! 비 다 맞는다. 일단 뛰어가자!"
   "그래 감기 걸린다고, 비 맞고 다니면 혼나"
   "이미 충분히 늦어서 지금 가도 혼날거야!"
   "안걸리면 돼 멍청아"
   "누구보고 멍청이래?"
   "잠깐....!!"

  유중혁의 말을 무시하고 그들은 마을로 가는 길을 냅다 달렸다. 유중혁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한수영에게 휘둘렸고 유미아도 얼결에 이지혜에게 팔이 잡혀 뒤따라왔다. 김남운이 따라오며 유미아의 위를 겉옷을 벗어 가려주고 있었다. 유중혁은 자신의 팔을 잡은 한수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단발머리가 잔뜩 젖어 찰랑거렸다.
  그들은 모두 빗속을 달리고 있었다. 팔이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그의 팔을 잡은 손도 축축하게 젖고 있었다. 다섯 그림자는 마을로 향하는 뒷길을 달렸다. 철벅거리면서 물웅덩이를 밟아 젖은 신발이 무거웠고 불쾌한 소리가 났지만, 그들의 집이 가까워 올수록 이상하게 발걸음이 가벼웠다.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유미아도
 유중혁도, 이지혜 한수영 김남운도 쫄딱 젖은 채 집 뒤편에 도착했다. 씌워 준 수고가 무용하게도 유미아도 잔뜩 젖어있었다. 남매는 집 앞에서 머뭇거렸다. 하지만 쪽문을 열어주고  들어가고 뭐하느냐는 눈빛을 보내는 그들 삼총사의 눈빛에 마지못해 젖은 발로 마루를 밟았다. 그들은 잠깐 기다리라며 마른 옷을 찾아오겠다고 사라졌다. 김남운 네 옷이 유중혁한테 맞을 것 같냐? 아 시비걸지 마라, 나도 요즘 키 많이 컸거든? 난 미아한테 맞을 만한 예전 옷이나 뒤져봐야겠다. 티격대는 소리가 저 멀리로 들렸다. 몰래 들어와야 한다면서, 깨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잔뜩 소리 죽여 바람새는 목소리로 싸우는 것이 웃겼다. 유중혁은 마침내 작게 웃어버렸다. 미아는 이미 키득대며 웃고 있었다. 뭐가 웃긴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웃었다. 변함없이 따뜻한 애정이 마음을 간지럽하는 느낌이었다.

  유중혁은
 하늘을 쳐다봤다.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은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잔뜩 마른 대지에 물이 적셔졌다. 잡초들이 투둑투둑 바닥을 튀기는 물방울에 맞아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김독자를 생각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 넌 혼자 무엇을 할까. 굴 속에서 떨어지는 비를 보며 여전히 털을 손질하고 있을까. 그는 그 부드러운 촉감을 당장이라도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바로 찾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 착한 하얀 여우를 언젠가 꼭 찾아가겠노라고. 함께 있어주고 털을 쓸어주며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유중혁은 빗소리를 들으며 금색으로 빛나던 영롱한 눈을 떠올렸다.